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티 데이비스 (문단 편집) === 조운 크로퍼드와의 불화 === [[조운 크로퍼드]]와는 지독한 앙숙으로 유명했다. 공식적으로는 불화가 없다고 부정했으나 비공식적으론 암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시작은 크로퍼드에 대한 데이비스의 질투였다. 데이비스가 힘들게 오디션을 보면서 배역을 따는 무명 배우의 삶을 살고 있을 때 크로퍼드는 이미 전성기에 돌입해 있었는데, 데이비스는 무용수 출신 크로퍼드보다 연기 학교에서 공부한 자신이 더 뛰어난 배우라고 생각해 크로퍼드를 질시했다. 데이비스는 사석에서 "크로퍼드 양은 스타지만, 나는 배우야"라고 자주 말하고 다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후 악연이 여러 번 겹치면서 데이비스는 크로퍼드에게 더 깊은 앙심을 품게 되었다. 1933년 워너 사는 로 데이비스의 이름을 처음으로 영화 제목 위로 올리면서 홍보를 야심차게 준비했는데, 하필 워너 사가 언론사에 홍보 자료를 뿌린 날 크로퍼드가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첫 번째 남편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니어]]와의 이혼을 발표했다. 크로퍼드의 이혼이 온갖 신문의 1면을 장식하게 되면서 데이비스의 신작 소식은 구석진 자리의 단신으로 옮겨졌고 결국 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를 받고 말았다. 1935년 데이비스는 <데인저러스>를 찍으면서 상대 배우인 프랜쵸우 토운에게 크게 반한다. 그러나 토운은 이미 크로퍼드와 사귀던 중이었고 둘은 <데인저러스> 촬영 도중에 약혼까지 했다. 데이비스는 당시 토운이 크로퍼드에게 깊이 빠져있었고 촬영 중 점심시간마다 크로퍼드와 만났다고 시인했음에도, 크로퍼드가 자신에게서 토운을 뺏어갔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말년에도 바로 이 점 때문에 크로퍼드를 용서할 수가 없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자연히 크로퍼드 역시 데이비스에게 악감정을 갖게 되었다. 1936년, 데이비스는 수상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이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했는데, [[SAG-AFTRA|미국 배우 조합(SAG)]]의 결성에 같이 항의하자며 잭 워너가 억지로 데려간 자리였다. 당연히 SAG를 지지하던 데이비스는 워너에게 시위하는 뜻에서 거의 꾸미지 않은 채로 갔다. [[로저 무어]]에 따르면 데이비스가 시상대에 오르기 전 크로퍼드가 "옷이 참 예쁘네!"라고 비꼬며 창피를 줬다는 목격담이 할리우드에 널리 퍼져있었다고 한다.[* 일이 벌어졌을 당시에 무어는 9살이었으나 업계에 들어온 후 이 일화를 전해듣고 자서전에 적어두었다.] 그래도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민 건 크로퍼드였는데, 1943년 MGM에서 워너 사로 이적한 뒤 크로퍼드는 개인 분장실을 데이비스 옆방에 배정해달라고 요청한 뒤 꽃과 선물을 잔뜩 보냈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이를 전부 돌려보냈다. 데이비스가 이를 두고 "[[레즈비언]]의 (성적) 접근"이라고 뒷담화를 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는 그저 비아냥거리려고 한 말만은 아니었다. 당시 할리우드에는 크로퍼드가 [[양성애자]]라는 소문이 기정 사실처럼 번져있었기 때문이다.[* 워너 사는 두 사람을 위해 여성재소자들을 소재로 한 (1950)를 기획했는데, 데이비스가 "레즈비언 영화 같은 건 안 찍는다"며 거부해 다른 배우들로 교체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실제로 크로퍼드가 반농담식이긴 하지만 데이비스에 대한 성적 호기심이 담긴 발언을 했다는 주변인들의 증언도 있다. 이후 데이비스가 거절한 영화들에 크로퍼드가 나와서 줄줄이 고평가를 받자 데이비스가 이를 질투하고 화를 내면서 사이가 더 틀어지게 되었다. 크로퍼드는 <밀드러드 피어스>(1945)로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1947)로는 후보에 올랐다. 1952년 크로퍼드와 사이가 틀어진 부부 작가 캐서린 앨버트와 대일 윤슨[* Katherine Albert. Dale Eunson.]은 크로퍼드를 기초로 하여 대본을 쓴다. 데이비스는 기꺼이 주연을 맡았고 보란듯이 인터뷰마다 최고의 대본이라고 극찬하고 다녔다. 이 영화 <스타>에서 여주인공은 명성에 집착하는 한물 간 스타로 묘사된다. 영화는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데이비스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려주었다. 앨버트 부부는 이렇게 크로퍼드를 모욕해놓고도, 황당하게도 자신들의 딸이며 크로퍼드의 대녀였던 신인 스타 조운 에번스[* Joan Evans.]가 겨우 17살에 자동차 판매사원과 결혼을 하겠다고 하자 크로퍼드에게 딸의 고집을 꺾어달라고 부탁했는데, 크로퍼드는 복수를 위해 반대로 아예 자신의 집에 판사와 언론을 부른 뒤 조운 에번스의 결혼식을 열어주었고, 일이 다 끝난 뒤에 앨버트 부부에게 후통보했다. 다행히 조운 에번스는 남편과 백년해로했고 크로퍼드에 대해 늘 감사하게 생각했다. <제인의 말로>(1962)를 같이 찍자고 제안한 사람은 크로퍼드였다. 자신이 반드시 제인을 맡아야 한다는 데이비스의 주장도 받아들였다. 데이비스는 수락 전에 감독 라버트 얼드리치가 크로퍼드와 잠자리를 갖고 있진 않은지 확인하기도 했다. 영화를 찍으며 얼드리치가 크로퍼드를 더 편애하면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다가 촬영장에서 일이 터졌다. 당시 크로퍼드는 네 번째 남편 앨프러드 스틸[* Alfred Steele. 1900 - 1959.]이 [[펩시]] CEO였던 덕분에 펩시의 이사로 있었는데, 데이비스는 오로지 크로퍼드를 엿먹이기 위해 크로퍼드의 분장실에 [[코카콜라]] 자판기를 설치했다. 이에 크로퍼드는 데이비스의 제인 역이 자신의 블랜치 역을 때리는 장면에서 데이비스가 자신을 진짜로 때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대역을 부탁하기도 했다. 대역을 쓰지 못한 근접촬영 부분에서 실제로 데이비스가 크로퍼드를 심하게 때리는 걸 확인할 수 있다는 얘기가 있다. 열받은 크로퍼드는 데이비스가 바닥에 쓰러진 자신을 끌고가는 씬을 촬영할 때 주머니에 돌을 넣어놓았고 일부러 연기를 망쳐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찍게 해 데이비스를 기진맥진하게 만들었다. 이후 둘은 싸움을 자제했지만 영화 촬영이 끝나자마자 인터뷰에서 서로를 깎아내리기 바빴다. 홍보 행사에 크로퍼드가 불참한 게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다. 훗날 크로퍼드는 내부 시사회가 끝난 뒤 데이비스에게 의견을 물었을 때 데이비스가 "나의 훌륭한 연기가 잘 담긴 영화다"라고만 하고 자신의 연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아서 속으로 매우 실망한게 불참한 이유라고 밝혔다. 다음해 데이비스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오르자 크로퍼드는 함께 후보에 오른 [[앤 밴크로프트]], [[제럴딘 페이지]], [[캐서린 헵번]], 리 레믹에게 만약 시상식에 못 가게 된다면 자신이 대리 수상을 해주겠다고 연락을 돌린다. 불참한 밴크로포트가 수상자로 발표되자 크로퍼드는 시상식 무대로 올라왔고 데이비스가 보는 앞에서 대리이긴 하나 아주 보란듯이 수상을 했으며, [[그레고리 펙]] 등 다른 수상자들과 함께 활짝 웃으며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oscars_1963.jpg|width=100%]]}}} || 이후 데이비스는 모든 인터뷰에서 크로퍼드가 자기가 상을 못 받게 하기 위해 로비를 했다고 말하며 분노했다. 물론 크로퍼드는 부인했지만 둘의 사이는 겉잡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제인의 말로>의 성공을 재현하기 위해 기획된 <허쉬 허쉬 스윗 샬롯>(1964)에서 또 일이 터졌다. 크로퍼드보다 촬영장에 먼저 도착한 데이비스가 모든 스태프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서[* 데이비스는 영화의 제작에도 관여했기에 영향력이 컸다.] 크로퍼드를 왕따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사실 이건 크로퍼드 잘못도 있다. 크로퍼드는 영화 현장에서 전권을 휘두르는 폭군같은 행동으로 당시 악명이 높았고 결국에는 스태프들조차도 등을 돌리게 되었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크로퍼드가 열흘만에 병가를 내자[* 처음엔 꾀병이었으나 나중에는 피로가 몰려와서 진짜로 몸이 아팠다고 한다.] 제작사는 크로퍼드의 병원에 찾아가 데이비스 때문에 꾀병을 부리는건 아닌지 뒷조사까지 했다. 얼드리치는 크로퍼드를 카메라 앞에 세우기 위해 사설탐정까지 고용해 크로퍼드의 근황을 살폈지만 다른 배우로 교체하지 않으면 영화 제작 자체를 취소하겠다는 워너 사의 협박에 몇 여배우들에게서 거절을 당한 뒤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올리비아 더 해빌런드]]의 승낙을 얻어냈다. 제작사가 관여했다고는 하지만 당시 촬영장에서 데이비스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누가 그 뒤에 있었는지 대충 예상이 갈 것이다. 크로퍼드는 자신이 강판된 사실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알았다고 한다. 1977년 크로퍼드가 사망한 뒤론 데이비스도 차차 누그러졌다. 크로퍼드의 연기력만큼은 존경한다는 발언을 한 적도 있고 1978년 크로퍼드의 입양딸이 그 유명한 "[[https://www.amazon.com/Mommie-Dearest-Christina-Crawford/dp/0966336909|Mommie Dearest]]"라는 회고록으로 크로퍼드를 비난했을 땐 배은망덕하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훌륭한 내 딸 B.D.가 나에 대해 그런 고약한 책을 낸다면" "내게 얼마나 상처가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 "(실제로 그런 일을 당한) 크로퍼드가 매우 안타까울 뿐이다"라고도 덧붙였다. 말이 씨가 됐는지 1985년 데이비스의 딸 B.D. 하이먼도 "[[https://www.amazon.com/My-Mothers-Keeper-B-Hyman/dp/068804798X|My Mother's Keeper]]"라는 책을 내며 데이비스는 "학대하고 군림하는 사악한 어머니"였으며 "역겨운 알코올 의존증 환자"라고 폭로했다. 그러나 크로퍼드의 경우만큼 대중에게 널리 받아들여지진 않았고, 데이비스는 1987년 회고록 "This 'n That"을 펴내며 반박했으며, 데이비스의 입양아들 마이클 메럴도 사실이 아니라고 맞서며 B.D. 하이먼과 연을 끊었다. 둘의 사이는 이후에도 회자되어서 2017년 [[수전 서랜던]]과 [[제시카 랭(배우)|제시카 랭]]이 출연한 미니 시리즈 [[퓨드]]로 제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